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단 편집) === 육군의 승전에 따른 해군의 위기감 === 해군이 객관적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태평양 전쟁]] 개전을 적극 지지한 이유도, '''[[중일전쟁]] 이래 화려하게 언론에 주목받는 육군을 질투해서'''라고 하는 증언이 전후 [[해군반성회]]에서 나왔다. 누가 봐도 어처구니가 없는 셈이었다. 명목은 [[미국]]이 금수조치를 취한 자원의 확보였지만, 육군만 전선에서 화려하게 승전보를 올리는 걸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탓도 컸다. 해군이 가진 전투기와 함선은 기껏해야 중국 근처 해변에서나 활약할 수 있었지만, 육군이 점점 해군이 개입할 수 없는 내륙에서도 전공을 세우고 발언권과 세력을 늘려가는 꼴을 두 눈 뜨고 볼래야 도저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벌어질 수 있는 예산다툼의 문제가 해군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당시 일본 국방예산의 약 80%는 해군이 가져가고 있었는데, 육군은 이를 문제삼으며 근무태만인 해군보다 육군이 예산을 더 가져야 된다고 주장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육군의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는 것은 명약관화하며 예산 배정 상황이 육군 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 콧대 높던 일본 육해군도 건드리지 못하는 정부 조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정부 예산의 집행을 책임진 [[일본 재무성|대장성]]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을 관리하는 조직은 조직의 생명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장성의 말단 직원이 관동군을 실사하러 만주에 출장을 오자, 그 막장 관동군조차 일개 대장성 말단 직원을 위해 부대 사열식까지 실시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당시 수상은 육군 출신 [[도조 히데키]]였다. 예산 배분이 육군중심으로 돌아갈 것만 같고, 정부 전체도 육군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니 라이벌인 해군은 소외감을 느낄 것임이 당연지사였다. 해군은 이에 발끈하여, "우리도 큰 거 한번 내질러 뭔가 보여주자"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답이 없다|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가망없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질투도 질투지만 '''해군이 육군의 승전에 위협을 느꼈다'''는 요인도 강했다. 육군이 해군을 협박했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육군 측이 해군의 조약파를 협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애초에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있을 때 일본 본토에 사령부를 두지 않고 함선에 사령부를 둔 게 육군 측의 암살을 걱정해서라는 말도 있다. 게다가 미국이 작정하고 나오면 얼마나 무서워질지 잘 아는 그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진주만 공습|진주만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도 육군의 협박에 질린 것이 원인 중 하나였다.] 결국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중국 내부에서 [[국공합작]]이 성사된 데다가, 일본이 점령하기에 중국은 땅덩어리가 너무 거대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면서 오히려 중일전쟁은 일본 육군 최대의 뻘짓이 되어버렸다.[* 플러스로 격파하고 계속 격파해도 군인이 계속 나온다. 왜냐? 일본은 일본령 조선, 일본령 대만까지 해서 아득바득 긁어모아 1억인데 중화민국은 지 혼자서 인구가 5억쯤이나 되니...] [[진퇴양난|이제 와서 발을 빼자니 그 동안 무시해 온 해군한테 역관광당할 게 뻔하고]], [[계륵|그렇다고 계속 전쟁을 지속하자니 이미 전선이 너무 넓어진 데다가 보급로도 길어져서 답도 없었다]]. 물론 해군의 자원문제도 [[태평양 전쟁]] 개전의 한 이유였지만, 이 자원 문제도 결국은 육군의 팽창정책이 불러온 [[태평양 전쟁/배경#s-2|미국의 금수조치]]가 [[헐 노트|주 원인이었는데]], 정확하게는 [[중국]]을 [[중일전쟁|건드린 게]] 결정타였다. 당시 [[중국]]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의 중요한 소비시장이었다. 그런데 이런 중국을 일본이 폭주하면서 무작정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을 야금야금 먹으려고 하자 연합국에서 제지를 한 것이다. 이럼에도 일본이 [[연합국]]의 제지요청을 씹고 전쟁을 계속하자, [[잠가라 밸브|당시 일본의 물주였던 미국이 금수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금수조치는 육군보다는 해군이 더 피해를 보게 되어 있었다. 일본은 자원과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전쟁에 필요한 자원이나 부품을 모두 [[미국]]으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는데, 이는 정신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몸빵으로 때우고 있던 육군[* 육군이 정신주의 이론을 중심으로 한 건 다름아닌 화력전에서 다른 열강들에게 밀리기 때문이었다. 통칭 [[반자이 돌격]]만 봐도 이런 걸 알 수 있다. 소련군의 일명 [[우라돌격]]과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프랑스군의 돌격 전술, 일명 [[엘랑 비탈]]과도 대조된다.]보다는 주로 기계를 사용하여 전투를 하던 해군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석유를 포함한 전쟁물자 대부분을 미국에서 수입했는데, 쓸 만한 유전이 없어진 상황에서 미국으로부터 [[잠가라 밸브|금수조치가 이뤄지자]] [[동남아시아]]에 있던 유전 및 자원지대를 탐내기 시작했고, 태클 걸 [[미국]]에게 선빵 때려서 태클 못 걸게 만든다고 전쟁을 일으킨 게 바로 태평양 전쟁이다. 문제는 그 석유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이 일본 해군이었다는 점이고, 결론은 자기가 필요하니 이유를 붙여서 국가를 막장으로 이끈 셈이다. 다른 이유로는 국내외적인 압박에서 오는 [[총체적 난국]]을 들기도 한다. [[중국]][* 사실 이 시점의 중국은 중국이라는 하나의 나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청조 멸망 이전부터 [[태평천국]]과 [[의화단]] 등등으로 각지에서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었던, 사실상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 이런 상황에 실질적으로 명목상으로만 통일 국민 국가의 수반이었고 실권은 끊임없이 유력 군벌들, 국민당내 반대파에게 도전 받았던 [[장제스]]의 권위와 지도력을 오히려 일본이 '''침략을 해주면서 더 세워 주었다'''. 중국을 침략하면서 이전까진 명목상일 뿐이었던 장제스의 권력을 민족의 사활을 건 총력전의 최고권력자로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치켜세워준 셈이고, 실제로 장제스는 중일전쟁 와중에나마 전쟁 이전에는 꿈도 못 꾸었던 정적들보다 절대적인 우위에 있는 권위를 확립했다. 물론 장제스보다 더한 일본의 삽질의 [[마오쩌둥|진짜 의도치 않은 수혜자는 따로 있다]].]과 중일전쟁을 시작한 이래에 전선은 늘어지고 불황은 계속되었으며, 이 와중에 [[미국]]과 [[영국]]은 중국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 독일]]이 승전하기 시작하자 여기에 승차해서 상황을 타개한다고 하는 작은 문제를 더 큰 문제로 만든 다음에 풀어버리는 병맛나는 해결책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모든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책은 나치 독일이 [[소련]]을 밀어서 영국과 미국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근데 이게 말이 되는 것이 사실 함대결전에서 백 번 이긴다고 쳐도 일본에겐 다음 계획 따위는 없었다. 일본이 [[태평양]]과 [[동남아시아]]를 장악하고 [[인도]]로 쇄도한다고 쳐도 [[미국]]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나라였다. 미국은 이미 1890년대에 [[유럽]]의 자본량과 생산량을 뛰어넘었으며, 식량과 공업생산, 지하자원을 모조리 자급하고도 남아서 [[유라시아]]에 수출하던 나라이자 당시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었다. 중동 [[유전#s-1.2]]이 본격적으로 개발돼서 세계 최대의 석유 산지로 떠오른 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게다가 광대한 영토와 엄청난 자본력, 풍부한 자원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굳이 식민지가 아니어도 충분히 무서운 상대였다. 미국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여기에 당시 고립주의 외교를 추구하던 미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미국은 유럽 열강들에 비해서 타 대륙에 식민지를 확보하는데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대신 미국은 [[남미]]에 집중해서 남미를 자신들의 영향권에 완전히 종속되게 하는데 집중했으며, 타 대륙에서는 경제적 이권이나 무역권을 가져가는데 주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해안에서 돌아가는 미국의 공장지대 사진들을 본다면, 이게 과연 1940년대의 모습인지, 현대의 모습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광대한 공장지대가 자리잡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동남아시아]] 자원 줄이 끊기면서 [[미국]]이 일시적으로 곤란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항상 뭔가가 부족한 일본이나 나치 독일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일본만의 힘으로는 동부 해안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정신승리|정신력이 나약한 미국이라는 이미지]]는 단순히 전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해상에서 봉쇄당하니까 백기투항을 하는 미국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 와중에 미국이 [[잠가라 밸브#s-3|석유 금수 조치]]를 내리며 압박을 하자 해군 내에서도 역시 개전론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물론 해군 내에도 3국 동맹 반대자들이나 개전 신중론자들도 많기는 했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육군이 '만약 육군이 본토로 돌아간다면 너희도 안전하진 못할 것'이라는 식으로 해군을 협박했다는 말도 있다. 이런 압박 속에서 결국 해군은 자기 자존심과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개전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예산은 먹을대로 먹는데 [[미국]]하고는 안 싸우는 겁쟁이 해군'''이라는 비난을 피하고 '나치 독일의 세계 지배에 일본도 반드시 한몫을 따내야 한다'는 계산 아래에서 미친 짓을 기어이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반면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이 당시 동맹국인 일본이 [[소련]]의 뒤를 쳐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랬기에 영국 항공전에서 패배하고 영국 점령을 실패한 후 '이제 [[소련]]을 공격한다'는 또라이 같은 계산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히틀러의 의중을 일본은 알 리가 만무했다.[* 추축국의 병맛 같음이 여기서도 느껴지는 것이 히틀러는 중대한 협업이 필요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전혀 일본의 의중을 파악하거나 상황을 교류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공격하면 쟤들도 친구니까 같이 패주겠지?' 정도의 단순한 생각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중일전쟁에 혀를 내두르고 태평양 전쟁으로 등골이 뜯겨나가는 마당에 더 강한 육군을 보유한 소련 극동군과의 전쟁은 1939년의 [[할힌골 전투]]에서의 패배 등으로 인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http://down.humoruniv.org/hwiparambbs/data/pds/a_7279254904_d888e6175bfe7120e4214067153c882d213c4e70.png|#]] 이러한 내용은 군령부 생존자들의 전후 반성회에서도 나왔으며,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도 드러난다.[* 영화에서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배우 야쿠쇼 코지가 연기하였다.] '''[[도박 중독|결과적으로 국내 정치를 위해서 말도 안 되는 도박에 나라 전체를 내던진 것]]'''[* 참고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자신도 중증의 [[도박]] 중독자였다. 자세한 건 [[야마모토 이소로쿠#s-1.3|항목]] 참고.]이다. 사실 이런 질투는 고질적인 것이었다. 진주만 공습 이후 해군이 [[A6M|제로센 전투기]] 및 에이스들의 전과를 언론 자료에 대대적으로 선전하자, 비밀주의를 엄수하던 육군도 이에 패할세라 방향을 180도로 바꿔 자신들의 [[Ki-43 하야부사]] 전투기와 에이스들을 선전하기 시작했다. 이런 질투는 허위 전과보고로도 이어졌으며, [[레이테 만 해전]] 직전에 해군은 [[대만]] 근해에서 미국의 기동함대를 격멸하고 항공모함 수 척을 격침했다고 뻥튀기 발표를 했다. 도중에 이런 뻥튀기 발표로 웃음거리가 된 경우도 있으니, [[대만 항공전]]에서 일본군이 "카미카제 공격으로 미 제3함대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여러 척의 군함을 격침하였다."고 거짓 발표를 하자, 홀시 제독은 즉시 니미츠 제독에게 "침몰당했다는 제3함대는 현재 해저에서 무사히 인양되어 적을 공격하기 위해 정해진 위치로 퇴각 중"이라고 보고했다. [[도쿄 로즈]]가 발표한 건 맞으나, 일본군 군부의 발표 자료를 인용해서 재발표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당장 일본에서 거짓 발표를 일컫는 말인 [[대본영발표]]라는 용어가 이래서 나온 것이었다. 문제는 후에 정찰로 이것이 과장된 전과임을 뻔히 알았는데도, 육군에 '''창피하여 알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육군은 적의 기동함대가 격멸되었다는 가정하에 [[필리핀]] 방어계획을 세웠으며, 결과는 [[미군]]이 필리핀에서 사실상의 무혈입성을 달성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사상자 비로 보면 1:2 정도로 미군이 일본군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전사자비는 대략 1:7 정도) 이 당시 전투는 기술의 한계로 야전 후송의 개념이란 것도 아직 부족하거니와 오늘날처럼 방탄복과 같은 보병 방호류도 없었기에 정상적인 군대의 보병끼리 맞붙는 경우 전사자 비가 아닌 사상자 비는 비슷해야 정상이다. 필리핀 전투는 태평양 전쟁 중 유일하게 미국 지상군과 일본 지상군이 비슷한 보병 수로 붙은 전투였고, 그런 전투조차 일본군은 동률의 사상자 교환비를 내지 못했다.] 해군의 개전 이유에 석유 문제가 들어 있다는 점은 이미 언급했다. 문제는 필리핀이 남태평양의 석유 수송의 핵심적인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데에 있다. 물론 해군이 정확한 정보를 알려줬다 하더라도 육군이 미군의 공세를 막아냈을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육군에게 체면을 구기기 싫어 헛소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둘의 사이가 나빴는지 증명이 되는 셈이다. 필리핀이 미군에게 점령되면 남태평양의 석유가 [[일본 열도|일본 본토]]의 탄약과 유리된다. 즉, 함대가 남태평양에 있다면 연료가 있어도 탄약이 없고, 일본에 있다면 탄약은 있어도 연료가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전세가 반전된 결정적 계기인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수상이자 육군상을 겸하고 있던 [[도조 히데키]]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해군이 '''제1항공함대 궤멸'''이라는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쇼와 덴노|히로히토]]에게서 이 소식을 듣고 해군에 문의해 겨우 패배 소식을 알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도조의 반응은 전쟁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아닌 육군이 그렇게 반대하던 작전에서 당하니 꼴 좋다는, 분노가 섞인 비웃음이었다 한다. 도조는 해군 군령부로부터 굉장히 축소된 피해 보고를 받고 그대로 천황에게 상주했다. 그런데 해군에게 따로 보고를 받은 천황이 말하는 수치와 도조가 보고받은 수치가 달라 그제서야 얼마나 큰 피해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실제 미드웨이 해전의 경과를 보면, 제1항공함대 기함인 [[아카기(항공모함)|아카기]]를 포함해서 [[카가(항공모함)|카가]], [[소류(항공모함)|소류]], [[히류(항공모함)|히류]] 등 제1항공함대의 핵심 전대로 있던 제1항공전대, 제2항공전대 도합 항공모함 네 척이 엔터프라이즈 소속 급강하폭격대와 요크타운에 임시로 배치된 새러토가 소속 급강하폭격대에 의해 순식간에 털렸다. 그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그러나 결국 격침당한 히류를 제외한 나머지 세 척은 함대에 끼어든 미 해군의 [[나왈급 잠수함#s-5.2|잠수함 한 척]] 잡겠다고 쫓아가다가 급하게 귀환한 [[아라시(구축함)|구축함 한 척]]의 삽질로 인해 가장 먼저 걸린 카가부터 시작해서 순식간에 꼬르륵. 이것이 일명 [[운명의 5분]]. 미드웨이에서 최후로 남은 한 척인 히류는 상황 판단을 잘못한 채 덤비다가 요크타운에 치명타를 입히기는 했으나, 중간에 영 엉뚱한 곳으로 갔던 호넷의 항공대[* 문제는 호넷의 경우인데, 요크타운과 엔터프라이즈의 혼성 비행대가 히류를 발견하기 전까지 엉뚱한 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호넷은 거의 한 것이 없다.]까지 끼어들면서 덤으로 꼬르륵. 저 때 히류는 건재하다고 자기들이 항공전 지휘를 맡겠다고 했는데, 냉정하게 보면 상황 판단을 잘못한 거다. 기함인 아카기를 포함해서 항공모함 세 척이 한꺼번에 털린 와중인데, 전력 보존도 생각하지 않고 덤빈 무모한 판단을 한 것이다.[* 다만 야마구치의 판단이 오판인지는 논란이 좀 있는 편이다. 결국 야마구치가 요크타운을 가라앉혀서 한 때 미국이 태평양에서 운용 가능한 항공모함이 하나도 없었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군은 가장 큰 항모였던 아카기를 비롯해, 그 많은 항모를 말아먹고도 쇼카쿠급과 히요급 등 항모가 어느 정도 남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결국 일본은 과달카날에서 삽질을 거듭한 끝에 미국에 타격을 입히는 데는 실패하였고, 야마구치와 히류의 사투는 결국 유종의 미도 거두지 못하고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정작 야마구치 다몬의 판단이 오판인 이유는 따로 있다. 당시 나구모 주이치는 히류가 살아 있다는 보고를 받고 히류가 살아서 일본에 돌아가면 적어도 미드웨이의 전훈을 뒷받침해서 새로운 전술을 짜내거나 할 수도 있으니 히류는 어떻게든 살려서 본토에 보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그걸 무시하고 요크타운을 엔터프라이즈로 착각하고 덤비다가 히류마저 침몰시킨 것이 바로 야마구치 다몬 자신이다. 게다가 이 부분은 나구모의 판단이 옳은 판단이었다. 만약 히류가 미드웨이에서 격침당하지 않았으면 과달카날에서 미군은 패전하고 [[호주]] - [[뉴질랜드]]가 아예 영연방에서 떨어져 나와 버려서 일본 영토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